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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감(sympathy)의 원인이 무엇이든, 혹은 그것이 어떻게 유발되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가슴 속 감정과 공감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반대로,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볼 때만큼 충격적인 경우도 없다. 모든 감정을 자기애(self-love)의 세련된 형태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원칙에 따라 이러한 기쁨과 고통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약점을 인지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공유할 때 그 도움을 확신하게 되어 기뻐하고, 반대로 그렇지 않을 때는 그들의 반대를 확신하게 되어 슬퍼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과 고통은 항상 너무 즉각적으로 느껴지며, 종종 너무 사소한 상황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이 그러한 자기이익적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한 후에,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만 그 농담에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당혹감을 느낀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그 농담을 듣고 웃음을 터뜨릴 때 그는 큰 만족감을 느끼며, 그들의 감정이 자신의 감정과 일치하는 것을 가장 큰 찬사로 여긴다. 그러나 그의 기쁨이 전적으로 그들의 공감으로 인해 자신의 즐거움이 더 생생해진 데서 오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그의 고통이 단지 그러한 기쁨의 부재로 인한 실망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우리가 책이나 시를 너무 자주 읽어 혼자 읽는 것이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읽어줄 때 여전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느끼는 놀라움과 감탄에 공감하며, 그 감정을 통해 우리가 즐거움을 얻는다. 반대로, 그가 그것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읽는 데 더 이상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타인의 즐거움이 우리의 즐거움을 증폭시키고, 타인의 무관심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우리가 친구들의 기쁨에 공감하는 것은 그 기쁨을 더 활기차게 만들기 때문이지만, 그들이 우리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은 그 슬픔을 완화하기 때문이다. 공감은 기쁨에 또 다른 만족의 원천을 제공하고, 슬픔에는 그 순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위안을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을 친구들에게 더 많이 공유하려고 한다. 우리는 친구들이 우리의 슬픔에 공감할 때 더 큰 만족을 느끼고, 그 공감의 부재에서 더 큰 충격을 받는다.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위안을 받는지 생각해 보라. 그들은 그 사람의 공감을 통해 자신들의 고통의 일부를 덜어낸 것처럼 느끼며, 그 공감이 고통의 무게를 덜어준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어느 정도 그 고통을 되살린다. 그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불행의 원인을 다시 불러오고, 이로 인해 눈물이 더 빠르게 흐르며, 슬픔에 완전히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이는 공감의 달콤함이 고통의 쓰라림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불행한 사람들에게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모욕은 그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동료의 기쁨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무례함으로 간주되지만, 그들이 고통을 이야기할 때 진지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명백히 잔혹한 비인간성으로 간주된다.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고, 분노는 불쾌한 감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친구들이 우리의 우정을 공유하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분노에 동참하기를 더욱 바란다. 우리가 받은 호의에 대해 친구들이 별로 감동하지 않는 듯 보여도 용서할 수 있지만, 우리가 겪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무관심하게 여긴다면 참을 수 없게 된다.

 

기쁨은 다른 보조적인 만족 없이도 충분히 지속될 수 있지만, 고통과 분노는 공감의 치유적 위로를 더 강하게 요구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때 즐거움을 느끼고, 공감하지 못할 때 고통을 느낀다. 성공한 사람을 축하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려는 우리의 본성은 이러한 공감을 반영한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들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할 때, 그것이 과장되었다고 여기며 약점으로 간주한다. 반대로, 누군가가 작은 행운에 지나치게 행복해 보인다면, 그들의 기쁨을 가벼움이나 어리석음으로 여긴다. 심지어 동료가 농담에 대해 우리가 느낀 것보다 더 크게 웃거나 오래 웃는 것을 볼 때도 우리는 불쾌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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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철학적 저서인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는 도덕과 인간 본성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다. 1759년에 처음 출간된 이 책은 인간의 공감과 도덕적 판단의 기초를 탐구하며,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설명한다.

주요 내용과 철학적 배경

스미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통념에 도전하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자연스러운 성향이 도덕적 판단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공감(sympathy)"이라고 부르며, 이 공감이 도덕적 행동의 원동력이 된다고 본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이나 행복에 공감함으로써 도덕적 올바름을 느끼고, 사회적 조화 속에서 개인의 행동을 조율한다.

책은 다음과 같은 핵심 주제를 다룬다:

  1. 행동의 적절성: 사람들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반응하는 능력.
  2. 공로와 비난: 도덕적 행동의 보상과 처벌에 대한 인간의 인식.
  3. 의무감과 양심: 개인이 스스로를 평가하고 도덕적 행동을 촉진하는 내적 원리.
  4. 덕(virtue)의 성격: 인간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성품과 행동.
  5. 도덕 철학 체계: 스토아 철학, 유틸리타리안주의, 그리고 자연법 이론 등 당대의 도덕 철학 전통에 대한 분석.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 Part I: Of the Propriety of Action
  2. Part II: Of Merit and Demerit; or, Of the Objects of Reward and Punishment
    • Section I: Of the Sense of Merit and Demerit
    • Section II: Of Justice and Beneficence
    • Section III: Of the Influence of Fortune upon the Sentiments of Mankind
  3. Part III: Of the Foundation of Our Judgments concerning Our Own Sentiments and Conduct, and of the Sense of Duty
    • Chapter I: Of the Principle of Self-Approbation
    • Chapter II: Of the Influence and Authority of Conscience
    • Chapter III: Of the Influence of Custom and Fashion upon the Sentiments of Moral Approbation and Disapprobation
  4. Part IV: Of the Effect of Utility upon the Sentiment of Approbation
    • Chapter I: Of the Beauty which the Appearance of Utility Bestows upon All the Productions of Art
    • Chapter II: Of the Beauty which the Appearance of Utility Bestows upon the Characters and Actions of Men
  5. Part V: Of the Influence of Custom and Fashion upon the Sentiments of Moral Approbation and Disapprobation
  6. Part VI: Of the Character of Virtue
    • Section I: Of the Character of the Individual
    • Section II: Of the Character of the Man of Rank and Condition
  7. Part VII: Of Systems of Moral Philosophy
    • Section I: Of the Questions which Ought to Be Examined in a Theory of Moral Sentiments
    • Section II: Of the Different Accounts which Have Been Given of the Nature of Virtue
 

공감에 대하여 (Of Sympathy.)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의 본성에는 다른 이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그들의 행복을 그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만드는 몇 가지 원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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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의 본성에는 다른 이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그들의 행복을 그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만드는 몇 가지 원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그가 그것으로부터 얻는 것이 단지 그것을 보는 즐거움뿐이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이러한 종류의 감정이 연민이나 동정심이다. 이는 우리가 다른 이들의 고통을 보거나 생생하게 상상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우리가 종종 다른 이들의 슬픔으로부터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여 이를 증명하기 위한 사례가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감정은 인간 본성의 다른 모든 본래적인 감정들처럼 결코 덕이 많거나 인간적인 사람들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이러한 감정을 가장 섬세하게 느낄 가능성이 높다. 가장 잔인한 악당이나 사회 법칙을 가장 완고하게 어기는 사람도 완전히 이 감정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유사한 상황에서 우리가 느낄 법한 것을 상상함으로써만 그들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우리의 형제가 고문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편안히 있는 한 우리의 감각은 그가 겪는 고통을 우리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우리의 감각은 절대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전달할 수 없으며, 상상력에 의해서만 우리는 그가 어떤 느낌을 받고 있는지 개념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상력조차도 그의 감각이 아닌 우리의 감각에서 그 느낌을 복사하여야만 가능하다.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그의 입장에 서서 그가 겪는 모든 고통을 견뎌내는 자신을 상상하며, 마치 그의 몸속에 들어가 그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느끼고, 따라서 그의 감각에 대한 어떤 개념을 형성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와 전혀 다르지 않은, 약간 약한 형태의 감정도 느낀다. 이러한 감정이 우리 자신에게 전달되고 우리가 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마침내 그의 느낌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몸이 떨리고 전율하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이러한 공감은,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우리의 마음을 상상으로 대치함으로써 우리가 그가 느끼는 것을 개념화하거나 영향을 받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다리나 팔에 곧 떨어질 것처럼 보이는 공격을 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다리나 팔을 움츠리거나 뒤로 당긴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떨어질 때, 우리는 고통받는 자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상처를 느낀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의 상처나 궤양을 볼 때, 체질이 섬세하고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서도 해당 부위에 가려움증이나 불쾌한 감각을 느낀다고 불평한다. 이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는 것은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러나 고통이나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상황뿐만 아니라, 어떤 열정적인 감정이 발생하는 상황도 공감을 일으킨다. 비극이나 소설 속 영웅들의 해방에 대해 느끼는 기쁨은 그들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슬픔만큼이나 진실하며, 그들의 행복에 대한 공감도 그들의 불행에 대한 공감만큼이나 실제적이다.

 

연민(pity)과 동정(compassion)은 다른 사람의 슬픔에 대한 우리의 공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공감(sympathy)은 그 의미가 아마도 원래는 동일했을지 모르나, 이제는 별다른 부적절함 없이 어떤 감정에 대해서든 우리의 공감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공감이 단지 다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정 감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때로는 감정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전달되고, 그 감정을 유발한 원인을 알기 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에서 강하게 표현된 슬픔과 기쁨은 이를 지켜보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유사한 고통스럽거나 기분 좋은 감정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킨다. 웃는 얼굴은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인상을 주며, 반대로 슬픈 얼굴은 우울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는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으며, 모든 감정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감정의 표현은 공감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감정을 유발한 원인을 알기 전에 오히려 혐오감이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화난 사람의 격렬한 행동은 그의 적이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해 우리가 더 분노를 느끼게 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의 분노를 유발한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거나 그가 느낀 감정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화를 내는 대상의 상황과, 그들이 격분한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폭력에 직면할 수 있을지를 분명히 본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두려움이나 분노에 쉽게 공감하며, 그들에게 큰 위협을 가하는 사람에 대항하여 즉시 그들의 편에 설 준비가 된다.

 

슬픔과 기쁨의 외형만으로도 어느 정도 유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면, 이는 그 감정이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사람에게 일어난 어떤 좋은 일이거나 나쁜 일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은 이 정도만으로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슬픔과 기쁨의 영향은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서 끝나지만, 그 감정의 표현은 분노와는 달리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될 다른 사람이나 그 사람과 대립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은 그 일을 겪은 사람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도발이라는 개념은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의 분노에 대해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가 이 감정에 공감하는 것을 꺼리게 하고, 그 원인을 알기 전에는 오히려 그것에 반대하는 쪽에 서도록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기쁨에 대해 느끼는 공감도, 그 원인을 알기 전에는 항상 매우 불완전하다. 고통받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 외에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일반적인 탄식은 실제로 우리가 강렬하게 느낄 만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그의 상황을 조사하고 싶은 호기심과 그에게 공감하려는 약간의 의지를 더 많이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이다.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전에는 그의 불행에 대한 모호한 생각에서 오는 불안과 그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스스로 추측하며 고통받는 것에서 오는 더 큰 불안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감은 그리 크지 않다.

 

공감(sympathy)은 감정 자체의 표현을 보는 데서보다는 그 감정을 불러일으킨 상황을 이해하는 데서 더 많이 생겨난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사람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그를 대신하여 느낄 때가 있다. 이는 우리가 그의 입장에 서게 되면 그 감정이 그의 현실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 속에서 우리 마음속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례하거나 뻔뻔한 행동을 했을 때 얼굴이 붉어질 수 있다. 이는 그 자신이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이는 우리가 그러한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행동했다면 얼마나 큰 당혹감을 느꼈을지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조건이 초래하는 모든 재앙 중에서 이성을 잃는 것은 인류애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끔찍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인간 비참함의 마지막 단계인 그것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깊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 빠진 가련한 자는 아마도 웃거나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비참함을 전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인류애가 그러한 광경에서 느끼는 고통은 고통받는 자의 감정이 반영된 것이 될 수 없다. 관찰자의 연민은 전적으로 그 자신이 동일한 비참한 상황에 놓였을 경우 무엇을 느꼈을지를 고려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아마도 불가능하겠지만, 그 상태에서 현재의 이성과 판단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의 감정에서 비롯된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이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을 들을 때 어머니는 어떤 고통을 느낄까? 그녀는 아이의 실제 무력함에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을 더하고, 병의 알 수 없는 결과에 대한 자신의 공포를 더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위한 가장 완전한 비참함과 고통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아이는 단지 현재 순간의 불편함만을 느낄 뿐이며, 그것은 결코 크지 않다. 미래에 대해서는 완전히 안전하며, 생각 없음과 선견지명의 결여는 인간 가슴의 큰 괴로움인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해독제를 제공한다. 이는 아이가 성장하여 성인이 될 때 이성이나 철학이 헛되이 막아보려 해도 방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죽은 사람들에게도 공감한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 즉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두려운 미래를 간과한 채 우리는 주로 우리의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태양의 빛을 잃는 것, 생명과 대화에서 단절되는 것, 차가운 무덤 속에서 부패와 땅의 벌레들의 먹이가 되는 것,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기억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가장 소중한 친구와 가족의 애정과 기억에서조차 사라지는 것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이렇게 끔찍한 재앙을 겪은 이들에게 너무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상상한다. 공감의 헌사는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서 잊힐 위험에 처한 그들에게 더욱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에 허망한 명예를 기리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비참함을 위해 인위적으로 그들의 불행에 대한 슬픈 기억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우리의 공감이 그들에게 어떤 위안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재앙에 더해지는 요소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무효라는 사실, 우리가 의무라고 부르는 것, 그들의 애도, 사랑, 그리고 친구들의 애도도 그들에게는 어떤 위로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단지 그들의 비참함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더 격렬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행복은 확실히 이러한 상황들 중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 대한 생각은 결코 그들의 깊은 안식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들의 상태에 자연스럽게 상상되는 그 음울하고 끝없는 슬픔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가해진 변화에 우리의 인식을 더하고, 그들의 상황 속에 우리 자신을 집어넣고, 다시 말해 우리의 살아 있는 영혼을 그들의 생명이 없는 육체에 두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그 경우에 느낄 감정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상상의 환영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예견하는 것이 그렇게도 끔찍하게 느껴지며, 죽어 있을 때 확실히 우리에게 어떤 고통도 주지 않을 상황들에 대한 생각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가 발생한다.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다. 이는 행복에 대한 가장 큰 독이지만 동시에 인간 사회의 부정의를 억제하는 중요한 제약이다. 이는 개인을 괴롭히고 좌절시키는 한편, 사회를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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